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면 내각 (문단 편집) === 사회 불안 === 4.19혁명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끝도 없는 [[시위]]의 물결로 가득했다. 장면 정부 10개월동안 가두 시위는 총 2,000여건, 시위 참가자만 100만 여 명에 달하였다. 매일 평균 7~8건의 시위가 발생한 셈이다. [[국민학생]]들은 [[교사]]의 전근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거나 [[어른]]들은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까지 발생하였다. [[한국 경찰|경찰]]은 [[대한민국 국회의원|국회의원]]이 뺨을 때렸다고 시위를 하였고, [[육군훈련소]]의 [[훈련병]]들은 [[장교]]가 하대를 한다며 시위를 하였다. 국회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여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창간되어 일간지는 기존의 41개에서 1960년 12월 말까지 390개로 증가하고 주간지, 월간지, 통신사도 마찬가지였다. 수가 늘어난 언론은 [[정부]]나 권력기관을 비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에 정부는 언론규제법을 시행하려다 실패하였다. > 장면은 안보와 치안의 핵심세력인 군과 경찰을 숙청과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다. 장면은 선거 공약으로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을 내놓았고, 집권 후 감군 정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3만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. 또 잦은 군 지도부 개편으로 1년도 안 되는 재임 기간 동안 국방부장관이 세 번, 육군참모총장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.[[일본제국 경찰|일제 식민경찰]]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 경찰관들은 4·19를 계기로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. 경찰서장 81명을 포함하여 경찰관 1만 7,000명이 해직됐고, 전체 경찰관의 80%를 근무지를 변경시켰다. 민주당 정권 9개월 동안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[[내무장관]]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. 그 중 네 명은 각각 한 달 간씩 재직했다.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민주당 집권기간 중 범죄가 두 배로 늘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90%에서 65%로 낮아졌다. 경찰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고 [[깡패]]와 [[조직폭력배]]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[[공권력]]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. >---- >-그렉 브라진스키 지음·나종남 옮김, 『대한민국 만들기 1945~1987』, 책과 함께, 2012, 186p >장면이 정권을 장악한 지 몇 달 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.7%만이 장면을 지지할 정도로 민심이 이반됐다. 미국 정부는 장면의 리더십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.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“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”이라고 예상했다. >---- >-그렉 브라진스키 지음·나종남 옮김, 앞의 책 190~191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